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개요 == || [[파일:external/i1089.photobucket.com/t34c_atguns_zpsdd5eebfd.jpg]] || || 일본군 방어선으로 진격하는 소련군 [[ZiS-3]] 대전차 포병반과 [[T-34-76]] 전차. || [[1945년]] [[8월 9일]]부터 시작된 [[소련-일본 전쟁]]의 주요 전투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이다. 간단하게 "만주 작전(Маньчжурск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약칭으로도 부른다.[* 흔히 '''8월의 폭풍 작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소련군]]은 해당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8월의 폭풍' 이나 '8월 폭풍'은 소련군의 작전명도, 소련군의 작전 개시 암호명도 아니었다. [[데이비드 글랜츠]] 대령이 '8월의 폭풍(장마철)의 시기에 작전이 개시되었다'라는 뜻에서 논문 제목을 '8월의 폭풍' 이라고 붙이고 이를 1983년에 발간하였다. 이후 미국 등지에서 소련군의 만주 침공작전은 8월의 폭풍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흔히 알려져 왔지만 이는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쓴 용어가 아니었다. 글랜츠가 2010년에 밝힌 비화에 따르면, 1983년 당시 10살이던 글랜츠의 딸 수지가 8월의 폭풍이라고 부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함에 따라 우연히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2018년 11월 [[길찾기]]에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296434|'8월의 폭풍']]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이미 만주 작전 이전부터 관동군은 약체가 된지 오래였다. 대일전 참전 이전까지는 소련이 대일 중립 노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미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을 상대하면서 부족한 전력은 만주에서 다 빼내고 빼내, 소련이 만주를 침공할 1945년 8월 당시의 관동군은 중일전쟁 당시의 관동군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를 정도로 약화돼 있었다. 과거 [[할힌골 전투]]에서 부족한 중장비로도 교환비 1:1 이상을 찍으며 소련군에 더한 인명 손실을 강요했던 초기의 관동군이 더 이상 아니었다. 정예사단들은 전부 남방으로 빠지고 남아있던 부대는 2선급이다. 거기다가 일본 자체적으로도 조사에서 관동군 전체 전력은 미군 4개 사단도 안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최후 국면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함께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 제국]]과 [[일본군]]의 최후의 저항의지와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은 사건이다.[* 일단 이렇게 된 이유는 [[결호작전]] 문서에서 보면 나오는데, 당시 일본 제국은 일본열도 본토를 포기하고 천황을 관동군으로 거동시켜서 저항을 계속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었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은 일본 제국의 결사항전 시도 자체를 밑바닥부터 박살내 버린 것이었다.] [[만주사변]] 이래 [[괴뢰국]] [[만주국]]을 15년간 점령하고 있던 이미 껍데기만 남은 [[관동군]]은 이로써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